전 세계를 덮친 경기 침체가 패션 소비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들이 비싼 명품 대신 실용적인 ‘가성비’ 제품으로 눈을 돌리면서 SPA 브랜드가 전성기를 맞았다. 이 변화의 정점에는 일본의 유니클로가 있다. 유니클로의 모회사 패스트리테일링은 지난해 사상 최대인 3조 4005억 엔의 매출을 기록하며, 구찌와 생로랑 등을 보유한 명품 공룡 케링그룹을 처음으로 추월하는 이정표를 세웠다.

 

유니클로의 질주는 특정 국가에 국한되지 않았다. 자국인 일본은 물론 북미,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 시장에서 고른 성장세를 보였다. 특히 북미 매출이 24.5% 급증하며 서구권에서도 ‘품질 좋은 저가 브랜드’라는 인식을 확고히 했다. 이는 경기 불황 속에서 합리적인 소비를 추구하는 트렌드가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았음을 증명한다. 회사는 이러한 기세를 몰아 올해 역시 최대 실적을 경신할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반면, 명품 시장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케링그룹은 주력 브랜드인 구찌의 매출이 20% 이상 급감하며 직격탄을 맞았다. 명품 업계의 가장 큰 딜레마는 가격 정책에 있다. 브랜드의 핵심 가치인 ‘희소성’과 ‘고급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선 가격을 낮출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불황에 대응할 마땅한 카드가 없는 셈이다. 이는 실용성을 앞세워 유연하게 대처하는 SPA 브랜드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명품 시장의 위기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세계 명품 소비의 30%를 차지하던 ‘큰 손’ 중국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기 시작한 것이 결정적이다. 한때 과시적 소비를 주도했던 이들이 이제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명품 업계의 성장 엔진이 꺼져가고 있다. ‘가성비’를 무기로 세계적 호황의 문턱에 섰다는 유니클로의 자신감 뒤로, 명품 브랜드의 깊어지는 시름이 짙게 깔리고 있다.